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빈 성씨 (문단 편집) ==== 《[[어제의빈묘지명]]》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어제의빈묘지명)] [[http://yoksa.aks.ac.kr/jsp/aa/VolView.jsp?mode=&page=1&fcs=&fcsd=&cf=&cd=&gb=&aa10up=kh2_je_a_vsu_25102_000&aa10no=kh2_je_a_vsu_25102_001&aa15no=001&aa20no=25102_001_0002&gnd1=&gnd2=&keywords=&rowcount=10|《어제의빈묘지명》]] [[http://yoksa.aks.ac.kr/jsp/aa/ImageView.jsp?aa10up=kh2_je_a_vsu_25102_000&aa10no=kh2_je_a_vsu_25102_001&aa20no=25102_001_0002|이미지]] 정조는 의빈 성씨가 죽자 손수 묘표와 묘지명의 문장을 지었다. 《[[어제의빈묘지명]]》은 정조가 지은 의빈 성씨의 묘지명의 원고이다. [* '''묘표'''는 곧 묘비로 돌로 만든 비석을 생각하면 된다. '''묘지'''는 망자의 신상에 대한 내용을 적어 무덤 내부나 근처에 묻은 것을 말한다. '''묘지명'''은 산문으로 쓴 '묘지'에 대응하는 운문인 '명'까지 함께 있는 경우를 일컫는다] 《묘지》(산문으로 쓴 것)에서 죽은 의빈 성씨에 대한 정조의 애틋한 마음이 드러난다. 정조는 두 글에서 의빈 성씨의 생애를 돌아보며 추억한 뒤 세계(世系)를 밝혔다. 일반적으로 《묘지》는 피장자의 간략한 이력과 세계를 밝히지만, 정조의 어제는 다소 긴 문장으로 비문을 꾸몄다. 조선에서 배우자를 위해 묘표나 《묘지》의 문장을 짓거나 글씨를 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여성을 위한 비문일 경우 어머니나 일족의 여성 어른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왕실에서도 역시 드문 일로 해창위 오태주(海昌尉 吳泰周)가 부인인 [[명안공주]]를 위해 비석을 세웠으며, 영조는 [[화순옹주]]를 위해 어필로 비석을 세웠고 [[영빈 이씨]]를 위해 묘지명을 지었다[[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6614|어제영빈이씨백자묘지명]]. 그리고 정조가 의빈 성씨를 위해 묘표와 《묘지명》을 지은 것을 꼽을 수 있다. 정조의 여인들 가운데 어제비를 받은 것은 의빈 성씨가 유일하다.[[http://www.newstow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431|#]] '''특히 의빈 성씨의 《묘지명》은 국왕이 글을 짓고, 당대 명필로 이름 높던 이들이 글씨를 쓴 것으로, 유사한 예를 찾기 힘든 경우이다'''.[[https://jsg.aks.ac.kr/dir/view?catePath=&dataId=JSG_K2-510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